Indescribable Place
예전 글 하나 본문
예전에 내가 썼던 글을 읽다가 발견한 글.
날짜는 2002년 2월6일이라고 되어있다.
이 정도면... 나도 꽤 괜찮게 쓰는데?-_-
----------
근간의 어느 술자리에서 잠시 할머니에 대해 언급을 한적이 있는것 같다.
어느 자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만두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명절에 시골에 가게되면 예외없이 할머님이 만드신 만두를 먹게 되는데, 강원도 만두가 다 그런지 아니면 할머님이 예전에 간도에 가신적이 있을때 익힌 솜씨인지 알수는 없으나, 그 만두의 크기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지라 단 두개만 먹으면 더 이상 밥을 먹기 힘든 정도였다.
그러나 작년 설까지만 해도 나보다 밥을 많이 드시곤 했던 우리 할머님.. (연세가 올해로 84인데도 불구하고!) 만두를 두개만 먹고 물러나는 모습을 용납하지 못하시는거라, 항상 잔뜩 먹이시고는 하셨었다. 내가 추석때 가지 못해서 확인하진 못했지만 추석때도 그러셨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랜 경륜에도 불구하고 할머님의 음식솜씨는 전체적으로는 아주 썩 맛있는 편은 아니다. 가장 할머니의 음식을 많이 드신 아버지도 인정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내가 딱 하나 할머니의 음식중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깻잎.
깻잎을 간장에 절여서 해주시는데, 할머님 만의 비법이 있는지 어쩐지 어머니가 아무리 하셔도 그 맛이 안나오고는 해서 종종 할머님이 만드신것을 가져다가 먹곤 했다. 요즘엔 내가 귀찮으니 안가져다 먹지만.. 2-3년전 까지만해도 가져다가 먹었다.
우리 할머니는 잔소리가 많으시다. 나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다 명절때의 것인데, 명절때 친척들이 모인 자리면 좋은소리만 하셔도 모자랄듯 싶건만 할머니는 항상 잔소리를 하셨다. 게다가 나로선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중얼중얼 하시듯 항상... 나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네,네 하고 대답하곤 했었다. 그리고 명절이 끝날때 내가 서울로 출발할라치면 항상 '얼른 중한이 색시를 봐야할텐데' 하시던 할머니.
이제 나는 그 왕만두도 깻잎도 먹을수 없고 할머니의 잔소리도 들을수 없다. 이제 할머니는 내가 서른살이 되는것도 나의 색시도 증손주들도 보실수 없다. 이제서야 나도 세상사람들이 다 그러듯이좀 더 잘해드렸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를 한다.
장례식을 마친 후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 친구들중 제일 먼저 결혼한 녀석이 드디어 2세가 제수씨 안에서 자라고 있다고 올린 글을 읽었다. 한 생명이 스러지는 사이에, 한 생명이 태어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인생임을, 나는 이십대의 마지막에 와서야 느끼고 있다.
날짜는 2002년 2월6일이라고 되어있다.
이 정도면... 나도 꽤 괜찮게 쓰는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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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의 어느 술자리에서 잠시 할머니에 대해 언급을 한적이 있는것 같다.
어느 자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만두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명절에 시골에 가게되면 예외없이 할머님이 만드신 만두를 먹게 되는데, 강원도 만두가 다 그런지 아니면 할머님이 예전에 간도에 가신적이 있을때 익힌 솜씨인지 알수는 없으나, 그 만두의 크기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지라 단 두개만 먹으면 더 이상 밥을 먹기 힘든 정도였다.
그러나 작년 설까지만 해도 나보다 밥을 많이 드시곤 했던 우리 할머님.. (연세가 올해로 84인데도 불구하고!) 만두를 두개만 먹고 물러나는 모습을 용납하지 못하시는거라, 항상 잔뜩 먹이시고는 하셨었다. 내가 추석때 가지 못해서 확인하진 못했지만 추석때도 그러셨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랜 경륜에도 불구하고 할머님의 음식솜씨는 전체적으로는 아주 썩 맛있는 편은 아니다. 가장 할머니의 음식을 많이 드신 아버지도 인정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내가 딱 하나 할머니의 음식중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깻잎.
깻잎을 간장에 절여서 해주시는데, 할머님 만의 비법이 있는지 어쩐지 어머니가 아무리 하셔도 그 맛이 안나오고는 해서 종종 할머님이 만드신것을 가져다가 먹곤 했다. 요즘엔 내가 귀찮으니 안가져다 먹지만.. 2-3년전 까지만해도 가져다가 먹었다.
우리 할머니는 잔소리가 많으시다. 나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다 명절때의 것인데, 명절때 친척들이 모인 자리면 좋은소리만 하셔도 모자랄듯 싶건만 할머니는 항상 잔소리를 하셨다. 게다가 나로선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중얼중얼 하시듯 항상... 나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네,네 하고 대답하곤 했었다. 그리고 명절이 끝날때 내가 서울로 출발할라치면 항상 '얼른 중한이 색시를 봐야할텐데' 하시던 할머니.
이제 나는 그 왕만두도 깻잎도 먹을수 없고 할머니의 잔소리도 들을수 없다. 이제 할머니는 내가 서른살이 되는것도 나의 색시도 증손주들도 보실수 없다. 이제서야 나도 세상사람들이 다 그러듯이좀 더 잘해드렸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를 한다.
장례식을 마친 후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 친구들중 제일 먼저 결혼한 녀석이 드디어 2세가 제수씨 안에서 자라고 있다고 올린 글을 읽었다. 한 생명이 스러지는 사이에, 한 생명이 태어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인생임을, 나는 이십대의 마지막에 와서야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