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escribable Place

봄 본문

WORK/ㄱㄴㄷㄹ

거울노을 2009. 10. 7. 16:49
"이제 슬슬 봄인가?"
 
 아직은 차가운, 맥주가 절반쯤 채워져 있는 500cc잔을 들이키면서 한 사내가 말했다.
 
 "글쎄, 아직 쌀쌀하지 않아?"
 
 "날씨는 약간 그럴지 모르지만, 저걸 보라구."
 
 사내가 가리키는 쪽에는 누가 봐도 확연한 봄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있었다.
 
 "흠... 내가 보기엔 좀 이른 옷차림인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우리가 보기엔 그럴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 그러면 이제 봄이 시작되는 거라구. 내일이면 두명, 모레면 네명, 이렇게 봄옷을 입은 여자들이 늘어날테고, 그러면 날씨도 풀리기 시작하는거야. 봄이 오는 거지. 봄은 여자의 옷차림에서 시작된다고 하잖아."
 
 "에이, 봄이 여자의 옷차림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잖아."
 
 "허허 이 사람 잘 모르는구만.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무슨 일?"
 
 "전혀 모르는 모양이네.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테니 잘 들어보라구. 일단."
 
 사내는 잔에 남아 있던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말야, 여자들이 결의를 한 적이 있었어."
 
 "옛날? 얼마나 옛날?"
 
 "글쎄... 그건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옛날이야.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옛날 이야기라는 거지. 옛날의 어느 날, 아마도 지금과 비슷한 계절이었을거야, 그런 날에 여자들이 결의를 했어. 정말 봄이라는게 여자의 옷차림에서 오는 건지 확인해보자는. 이대로 계속 겨울옷을 입고 다니면 과연 봄이 오는지 안오는지 확인하자고 말야."
 
 "헐. 뭐야 그런 얘기가 어딨냐."
 
 "잘 들어봐. 믿기진 않겠지만 어쨌든 옛날 이야기니까, 하지만 내가 여기서 지어낸 얘기가 아냐. 전해오는 얘기라구. 아무튼 그런 황당한 일이 단지 장난였는지 진지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어. 확실한 건 그 제안에 어찌된 일인지 정말 모든 여자들이 동참했다는 거야. 아주 설득력이 강한 누군가가 앞장서서 나섰겠지. 아니면 장동건같은 사람이 나서서 주장했기 때문에 다들 동참한건지도 모르고 말야. 낄낄. 근데 일은 그때부터 시작된거야. 날이 점점 지나고, 3월이 한참으로 접어들고 있는데도 날이 전혀 따뜻해지지 않는거야. 지금과 같은 날씨가 계속된거지. 다들 이변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어. 몇십년만의 추위라느니, 시베리아의 무슨 기단이 어쩌구 저쩌구, 지구 온난화가 어쩌느니 말야."
 
 "그래서?"
 
 "그쯤 되니까 이제 여자들이 당황하기 시작한거야. 다들 모여서 논의를 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뾰족한 수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시간만 계속 흘러갔어.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서 벌써 5월이 되어버렸지. 사람들은 추운 날씨에 어느정도 적응해버린 상태가 되었고 말야. 그래서 여자들은 다시 모여서 논의를 하고 결론을 내렸어. 봄은 이제 어쩔수 없고, 슬슬 여름옷을 입자고 말야."
 
 "그리고 여름이 왔다?"
 
 "왔지. 여름이 왔어. 여자들의 옷차림에 맞춰서 날이 슬슬 더워지더니 여름이 온거야. 그렇게 그 해는 봄이 없이 지나갔어. 날씨에 별로 관심없는 사람들은 모르게 말야. 그때의 여자들만 아는 얘기야. 나도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고, 할머니는 또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지. 암튼 그러니까 저렇게 약간 이르다 싶은 봄옷을 입은 여자를 보더라도 미쳤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지. 자칫 잘못하면 봄이 안올지도 모르니까. 그건 그렇고 비장의 얘기를 해줬으니 술은 니가 사는거지? 자,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