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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책] 지금은 없는 이야기

거울노을 2014. 4. 25. 11:27
지금은 없는 이야기 - 10점
최규석 지음/사계절

만화가 최규석의 우화집. 내 허접한 평 대신에 작가의 말을 옮겨적는다.



 세상은, 불평불만 하지 말고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이야기들로 차고 넘친다. 그래도 예전에는 삶의 고통을 견디는 굳건한 의지, 앙다문 이빨 정도는 허용해 줬지만 요즘에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요새 떠도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고통조차 웃으면 견뎌야 한다. 아니 애초에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고통을 고통이라 여기는 부정적 태도를 갖는 순간 우주의 에너지는 당신을 못 보고 지나칠 것이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은 오직 개인에게 있다. 치즈가 갑자기 사라지면 치즈가 왜 사라졌는지, 누가 갖고 갔는지 고민하지 말고 재빨리 다른 치즈를 찾아 나서야 하고, 아무리 고난을 웃음으로 긍정하며 극복해도 인생이 잘 안 풀린다면 그건 당신의 긍정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체가 불만족해도 웃으며 사는 사람이 있는 세상에서 힘든 내색, 남의 탓은 범죄다. 세상과 타인은 죄가 없다. 그것은 단지 주어진 조건, 그러니까 자연 같은 것이다.


 사실 수천년을 반복해 온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맞는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반은 맞다. 도둑질을 해도 담장이 높네 낮네, 금고가 신형이네 구형이네 불평하지 않고 상황을 긍정하며 꾸준히 자기 계발하는 도둑이 더 잘 훔치지 않겠나. 이처럼 긍정적인 태도를 권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런 얘기들이 너무 많다는 거다. 너무 많아서 당연하게 생각되고, 당연한 것이 되다 보니 다르게 생각해야 할 나머지 절반의 상황에서도 같은 관점으로만 사태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할 때도 있지만 중이 절을 고쳐야 할 때도 있는 게 세상 아닌가.


 물론 다른 말을 하는 얘기들도 많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책들이 수천 년 된 믿음 체계를 전복하리라는 포부로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 두껍고 복잡해서 써먹어야 할 때 기억이 안 나고, 결정적으로 잘 안 팔린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얻은 단단한 깨달음 하나, 세상은 이야기가 지배한다. 단순한 구조의,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는 짧은 이야기들. 교훈적인 우화들과 가슴을 적시는 수많은 미담들, 그 이야기들은 너무 쉽게 기억되고 매우 넓게 적용되며 아주 그럴싸해서 끊임없이 세상을 떠돌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바라보는 강력한 관점을 제공한다.


 이것이 내가 가끔이지만 꾸준히 우화를 창작하는 이유다. 그러니까 나를 짜증나고 분노하게 만드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대한 복수 같은 거다. 주먹에는 주먹, 이야기에는 이야기, 그런 거다. 그렇다고 해서, 너 따위가 몇 개 되지도 않는 이야기로 수천 년 동안 유통되어 온 이야기들과 맞서려는 것이냐고 책망하지는 마시라. 나도 안 된다는 것 알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이야기들 중 몇 개만이라도 살아남아 다른 많은 우화들처럼 작자 미상의 이야기로 세상에 떠돌다 적절한 상황에 적절하게 쓰이기를, 그리하여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