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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한철 인터뷰

거울노을 2007. 8. 28. 19:55
다행 다행 천만다행 지칠 줄 모르는 긍정, 이한철
필름 2.0 | 기사입력 2006-03-09 18:40

8년 만이다. 불독맨션의 리더이자 인디신의 큰형 이한철이 8년 만에 솔로 앨범을 내놓았다. '그저 시험 삼아'라는 쑥스러운 멘트로 일관하지만, 이 작은 EP에 12년 음악생활, 그의 철학이 녹아 있다.

이화정 기자 불독맨션이 아닌 이한철로 음반을 냈다. 솔로로는 8년 만의 앨범인데 반응이 좋다. 타이틀곡 'Fall in love'는 최근 라디오 방송순위 상위권이다.

이한철 그러게, 나도 놀란다. TV는 한 번도 활동 안 했는데 라디오에서는 계속 3등에서 왔다갔다하더라.

이화정 기자 틀어박혀 머리 싸매고 곡 쓰는 스타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음반 발매가 뜸했나?

이한철 작년엔 솔로로 한참 공연을 다녀서 그 연장선상에서 앨범을 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감을 잘 못 잡겠더라. 장르도 그렇고, 일렉 기타를 들고 할까 어쿠스틱 기타를 쓸까, 아니면 정장입고 발라드를 부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어떤 그림으로 그리면 좋을지 고민되더라. 1년 동안 공연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이번 앨범 두 번째 트랙 '도은호의 사랑'을 만들게 됐다. 밴드 세션인 도은호 형이 공연 갔다 만난 일본 여성과의 사랑을 그리는 이야기다. 어쿠스틱 기타에 일상적인 이야기, 습작하듯 소품 만들 듯 만들었는데 의외로 감동을 주더라. 곡을 만들 때도 그랬고, 주인공한테 앞에서 "형, 형하고 노리코 씨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야"라며 들려줄 때도 그랬고. 녹음할 때도 중간에 내레이션 하는데 찌릿한 게 타고 올라오더라. 이런 과정으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이화정 기자 '오르가닉(Organic)'이라는 앨범 명부터 그런 변화가 점쳐진다.

이한철 처음 대학가요제 나왔을 때가 개띠 해였으니까 올해로 가수활동 12년째다. 돌아보니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꼬아서 가는 버릇이 생겼더라. 밴드하면서 펑크, 라틴, 모던록, 여러 장르를 하면서 너무 다양한 길을 알아버린 거다. 컴퓨터에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깔아놓으면 속도 느려지고 바이러스 감염도 잘 된다. 그럴 때 포맷하고 기본만 깔아두면 팽팽 잘 돌아간다. 그런 느낌이었다. 한번 쫙 밀고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데 필요한 사운드, 필요한 악기로만 만들었다. 전자음의 삑삑 소리보다 어쿠스틱 기타의 따뜻한 느낌을 살린 거다. 소재 역시 멀리서 찾기보다 내 주변 이야기들이 더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아, 이래서 내가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는구나 하는 해답이 생겼다.

이화정 기자 쉽게 만들었지만 그런 심오한 깨달음이 있었나보다.

이한철 만들기는 한 달 반 만에 후다닥 만들었는데 그 전에 10개월 넘게 고민하고 곡도 버리기도 하고, 열 몇 곡을 녹음도 하고 했다. 해놓고도 느낌이 안 땡기더라. 접고, 접고, 나름 꽤 긴 고민의 기간을 거쳐 나온 앨범이다.

이화정 기자 이번 앨범은 다섯 곡밖에 수록 안 된 EP 앨범 아닌가. 원래 봄에 정규 앨범 계획이 있던데 그럼 곧 나오는 건가?

이한철 원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이번 앨범이 정규 앨범 분위기가 잡혀서 후속곡으로 '슈퍼스타'까지 하게 됐다. 어제 MBC 가서 미팅하고 왔는데, 새로 들어가는 비슷한 프로그램에 '슈퍼스타'를 메인타이틀로 쓰자고 하더라. 당분간은 '오르가닉(Organic)' 앨범 관련 투어 공연을 할 계획이다. 하도 오랜만에 내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다. 실은 밴드로만 음반을 내오다 다시 솔로로 내자니 부담이 많았다. 이 앨범은 일종의 연수 기간, 밑그림을 그려보는 기간이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간을 좀 보는 거다. 요즘 나오는 음악이 'Fall in love'처럼 통기타에 리듬 베이스만 한 곡이 잘 없다. 괜히 했다가 너무 트렌드하고 멀어져 외면당할까 두렵기도 했다.

이화정 기자 간을 보니, 간이 딱 맞았다.

이한철 흡수력이 있는 멜로디라고 하더라. 쉬워서 후렴이 쉽게 잘 들어와 편하게 많이들 부르시는 것 같다. 원래 나조차 내 음악에 올인을 해서 깊이 빠지는 식으로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 팬들도 그렇게 '이 가사는 왜 이렇게 썼나' 고민하면서 듣길 원하지 않는다. 편하게 즐기면 좋겠다.

이화정 기자 이번 음반의 곡들은 다 영화, 드라마와 관련이 있다. 'Fall in love'는 원래 <내 이름은 김삼순> 때문에 만든 걸로 알고 있다.

이한철 맞다. 말하자면 밀린 거다. 연락이 와서 급하게 만들었는데, 나중에 앨범 자체 컨셉이 다른 기획사 쪽으로 가면서 바뀐 거다. '바티스투타'는 영화 <싸움의 기술>에 쓰였다. 그 영화를 위해 만든 건 아닌데 비슷한 시기여서 기회가 닿았다.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바티스투타'랑 잘 맞겠다며 써도 좋겠냐 하더라. 원래 백윤식 선생님이랑 인연이 있다. 친분은 아니고. 작년에 김태욱 씨 음반을 프로듀싱했는데 '담백하라'라는 곡 뮤직비디오에 백 선생님이 나온다. 그때 같이 촬영해서 안면도 있고 해서 더 뜻 깊었다.

이화정 기자 사실, 왜 영화음악을 안 할까 싶다. 한국영화 O.S.T중 베스트 5에 <후아유> 음반은 꼭 들어가야 된다고 본다. 그 음반에 음악이 들어간 뮤지션으로서 영화음악에 계속 관심이 없나 하는 생각이 있다.

이한철 해보고 싶다. 화면을 보고 화면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재밌어 보인다. 요즘 일상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곡 쓰는 게 내 재미다. 얼마 전엔 봅슬레이 비슷한 경기를 보다가 저걸 곡으로 하면 어떨까, 그런 고민을 하기도 했다. 욕심은 있다. 1995년에 나온 솔로 앨범 곡명이 다 영화의 제목이었다. '델마와 루이스' '연인' '쥬라기공원' 그때 그런 거 많이 했다. 볼륨다운 시켜놓고 내가 저 장면에서 곡을 만든다면 어떻게 했을까 뭐 이러면서 곡 쓰고 그랬다. 지금도 관심은 있는데 영화음악은 아무래도 그쪽 제작사와도 인연이 있고 그래야 하는 거 같더라.

이화정 기자 12년 동안이나 활동했으면 사실 '너무 많이 아는 뮤지션' 아닌가. 그런데 이한철의 음악은 익숙하고 신난다. 몰라서 쉽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름의 철학이 정립되었겠다.

이한철 라틴음악도 해보고 별 거 다 해봤다. 그런데, 결국 음악은 최대한 그 뮤지션하고 비슷하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정이나 이미지 메이킹을 해서 인지도나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해도 나중에 '이게 내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후회되겠나. 내가 워낙 심각한 것도 심각하지 않게, 기분 나쁜 이야기도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편이다. 음악도 그렇게 가고 싶은 거다.

이화정 기자 설 추천음악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여러 가지 기분 상태에 따라 추천음악을 선정해 놓았는데, 이한철 음악은 졸릴 때 듣기 좋은 음악이라더라.(웃음)

이한철 그런 평가 좋아한다.(웃음) 우울할 때 음악이 우울을 달래주기도 하고, 더 우울하게 아예 바닥을 치게 할 수도 있다. 내 스타일은 기분 좋게 해주는 쪽이다. 왜 그럴까 고민해보니, 내 노래에 엇박자 멜로디가 많다. 쿵짝쿵짝쿵짝쿵짝. 이게 사람을 신나게 해준다.

이화정 기자 축제 게스트로 이한철을 갈구하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 일단 이한철이 등장하면, 미리 단단히 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역시 깜깜한 화면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가 이한철의 공연과 어우러지면서 축제의 장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한철은 영화제에도 꼭 필요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한철 작년엔 다른 축제도 많이 다녔지만 특히 영화제에 많이 갔다. 부천영화제는 벌써 오래됐고, 전주영화제, 제천영화제까지 바쁘게 뛰었다. 영화제 가서 공연하면 다른 장소의 관객들이랑 좀 다르다. 이분들은 영화제 기간 동안은 일단 그 문화에 올인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는 거다. 운동화 신고, 허리띠 매고, 자 공연하자! 이런 게 되는 거다. 근데 정말, FILM2.0에 한번 '영화제의 친구'라고 기사가 나간 뒤로는 영화제 기획자들에게 더 연락이 많이 온다. 왠지 이 친구 빼놓고 하면 안 된다는 영화축제 전문 뮤지션처럼 인식이 됐나보다.

이화정 기자 그런데 한편으론 뮤지션에게 늘 이런 이미지만을 강요하면 조금 서운한 생각이 들지 않나?

이한철 솔직히 그런 고민이 있다. 처음부터 사투리 쓰고 그래서 방송에서 재밌는 캐릭터로 인식돼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번 앨범 곡 중에 '꿈속에서 보낸 한철'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나름 1인극처럼 꾸며보았다. 근데 다들 웃는다. 뛰겠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연기를 하니까 적응을 못하는 거다. 적당한 균형을 찾는 거, 그게 숙제더라.

이화정 기자 처음 이한철을 크게 알린 건 음악이 아니었다. 가수가 노래 안 하고 시트콤에서 '안녕맨'하고 그랬다. 그러더니 메이저로 활동하던 이한철이 어느 날 인디신으로 가고, 또 어느 날부터는 다른 인디뮤지션과 달리 메이저와 접점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독특한 행보다.

이한철 대학가요제에서 어떻게 잘 풀려서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판도 내고 TV 쇼 프로그램도 나가고 시트콤도 하고. 재밌었던 것 같다. 근데 음악적인 부분과 다르게 활동한 것이 패인이었다. 그러다 음반을 세 장 접었다. 솔로 1, 2집을 하고 지퍼 앨범까지 했는데 안됐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컴퓨터 작업이 활성화되지 않아 앨범 내는 게 쉽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가수 한 명이 앨범 세 장 말아먹으면 그 가수는 끝난 거다. 가수로 전면에 나서는 건 불가능이다. 작곡가를 하든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공들여 만든 앨범 한 장 한 장을 접을 때 상처가 있는데 그걸 세 장 하고 나니까 나도 겁이 나더라. 곡은 만들어놨는데 무섭더라. 그때 어떻게 인디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디로 뭘 하는 것은 부담이 없더라. 메이저에서 음반 한 장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사장은 이거 한 장 만들자고 전세를 월세로 낮추고, 부장은 내년에 학교 들어갈 애가 있고, 직원에 코디까지 줄줄이 있는 거다. 이 앨범의 주인은 난데, 나보다 이 앨범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거다. 그래서 인디를 택했다. 불독맨션으로 500만 원 들여 EP앨범을 냈다. 그때부터 한 계단씩 한 계단씩 뒷걸음질 안치고 남산 계단 올라가듯 올라갔다. 케이블카 타고 쭉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냥 느리지만 뒷걸음질 안치고 한 계단씩 올라갔다. 남산 정상은 아니더라도 어느 수준까지는 올라간 거 같다.

이화정 기자 메이저에서 인디로 갔을 때의 시선, 메이저에서 성공 못해 온 이방인이라는 인디신에서의 시선, 어느 하나 곱지 않았을 것 같다.

이한철 그때 공연 한 번 하면 관객이 20명, 30명이었다. 같이 음악 했던 가수들은 "니가 왜 그런 공연을 하고 있냐. 잘 해야 하지 않겠냐"하고 핀잔을 줬다. 인디신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잉 넛이 뜨면서 인디신이 매체에서 막 조명 받을 때였는데 '메이저에서 안 되니까 여기 와서 두리번거리나 보다'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는 못해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들리든 말든, 그래도 했다. 신념 같은 게 아니라, 그 길밖에 없었다. 음악을 너무 하고 싶은데 어쩌겠나. 그 모든 이야기들을 설득력 있게 답변해줄 수 있는 길은 실력밖에 없더라. 관객 100명 채우는 데 1년 넘게 걸렸다. 입소문으로 가야 되는 거니까. 무조건 해야 된다는 확신 없으면 좀 하다가 메이저 기획사 두리번거렸을 거다. 그런데 꾸준하게 이런 모습 보여주니까 인디에서 활동하는 밴드들하고도 하나둘 친해졌다.

이화정 기자 그런 시선을 감내했었으니 만족도는 더 컸겠다.

이한철 공연 한 번 준비하는데 두 달씩 연습하고 했다. 느는 게 눈으로 보이니 쾌감이 장난 아니더라. 2000년 12월 24일 날이었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피드백'이라는 클럽이 하나 비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노느니 뭐 하냐, 그럼 공연하자 했다. 당시에 팬들이 밥 못 먹을까봐 뭘 자꾸 사다주고 했는데, 바닥부터 시작하고 보니 한 명 한 명이 다 소중하더라. 그래서 그 공연 때 멤버들하고 돈 모아서 티셔츠를 백장 맞췄다. 그런데 티셔츠가 모자라서 못 줬다. 그게 처음으로 관객 수가 세 자리 되는 공연이었다. 그때부터 일이 쉽게 되더라. 대개의 밴드들이 초기에 활동하다 배터리가 방전돼서, 해봤자 소용없고, 관객도 안 들고 이게 뭐냐 하고 낙담한다. 그게 고비인 거다. 그럴 때 멤버들이 소원해지고 그러면 잘 안 보게 되고, 다른 밴드랑 프로젝트하고 그런다. 그걸 넘겨야 한다.

이화정 기자 지금은 후배들이 의지하는 인디신의 맏형이다.

이한철 가족 같이 지낸다. 더군다나 '도은호 사건' 이후로는 심해졌다.(웃음) 나는 여러 곡 중 하나로 그 형 스토리를 쓴 건데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자기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거다. 형은 맨날 나만 보면 고맙다고 하고 뭘 자꾸 사주려 한다. 얼마 전엔 양말을 사주고, 자전거 자물쇠도 사주고 하더라. 정을 받았으니까 정으로 주는 거란다. 형하고 그런 교감이 생기니까 동생들끼리도 그런 분위기가 생기더라. 우리 레이블에 식구가 13명 되는데 지금은 진짜 가족 같다. 어떤 친구는 엑셀 배워서 돈 들고 나는 거 정리하고, 어떤 친구는 연습실 관리하고. 다들 그런 역할을 줬다. 일하는 만큼의 월급은 아니지만 핸드폰 요금 대주고 그런다. 사실 인디뮤지션들이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음반 내면 방송국 돌리고, 정말 한두 군데 라디오 출연하고, TV는 연락 없고, 클럽 공연하는 거다. 조금 힘을 낸다면 대구, 부산 정도 클럽 공연 갔다 오면 진지하게 만든 음반 활동 끝나는 거다. 똑같은 거 계속 할 수도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1주일에 조금이라도 규칙적인 일거리를 줘야 긴장이 생기는 거다. 장난처럼 했지만, 그런 이유다.

이화정 기자 몸소 그런 시절을 겪어봐서 더 잘 알겠다.

이한철 고민 엄청 많을 때다. 다들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살 또래다. 한 명씩 한 명씩 만나면 '형, 걱정돼 죽겠다' 한다. 서른 됐는데 더 이상 집에서 돈도 못 받아쓰고, 그렇다고 내가 용돈을 조금씩 주는 것도 의미 없는 일 아닌가. 나이 들면 잔소리 많아진다고 하지 않나. 요즘 내가 그렇다. 술만 먹으면 애들한테 잔소리를 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똑같은 고민하고,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으니까.

이화정 기자 본인은 암울한 그 시절을 어떻게 극복했나?

이한철 내가 좀 개념이 없다. 집에서 받아쓰고 그랬다. 근데 그런 거 신경 썼으면 아예 인디로 내려오는 일 자체가 없는 일이었을 거다. 대구 내려가서 어디 직장 다니든지, 아니면 미사리 가서 그나마 히트곡인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이나 계속 부르고 있었을 거다. 누가 그거 돈 많이 주는데 왜 안 하냐고 하더라. 근데 그런 거 하려고 음악을 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집에서 돈 받아썼다.

이화정 기자 이제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예술대학원도 다니고, 자리가 든든하다. 레이블 '튜브앰프'의 대표이기도 하고.

이한철 어느 순간 내가 해야 하는 몫이 보이더라. 인디레이블 하는 사람들하고 다 친군데, 세금 같은 거 정산할 때 서로 몰라 전화하고 그런다. 가령 '나 CF곡 쓰는데 어떻게 해야 돼?' 이런 거 물어오면, 그 메이저 창구가 나다. 내가 공부를 좀 해서 서로 방법을 공유하면 좋겠다 싶더라. 그래서 지난 학기에는 음악 저작권 위주로 공부를 많이 했다. 또, 멜로디가 로맨틱하고 좀 따뜻한 음악을 하는 친구들은 나비가 꽃을 찾듯 내 뒤에 있다. 그러면, 이런 음악은 우리 레이블로 내야겠다고 결심한다. 이렇게 뭉쳐놔야 서로 영향을 주고 자극도 받고 할 수 있다.

이화정 기자 2006년은 그럼 솔로 활동만 하는 건가?

이한철 그렇다. 내년쯤 다시 밴드 활동할 생각이다. 일단 3월 4일 홍대 롤링홀에서 공연이 있고, 18일, 24일, 26일 대구, 부산, 후쿠오카까지 간다. 작년에 한 번 갔는데 반응이 좋더라. 사실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것보다 부산에서 후쿠오카 가는 게 더 가깝다. 활동 폭을 그렇게 조금씩 넓혀나가야 하는 사명감이 있다. 그 참에 다른 밴드들도 소개해주고. 도쿄는 머니까 그렇게 시작하는 거다. 정말 무식한 방법이지만, 앞으로 후쿠오카를 발판으로 오사카도 가고, 오사카를 발판으로 또 도쿄도 가고 그러지 않겠나.

이화정 기자 현역 뮤지션 중에는 적지 않은 나이다. 뮤지션으로 지속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또 하나의 숙제다. 뭐든 첫 번째로 겪어나가는 위치다.

이한철 불독맨션 2집하면서 그런 생각 많았다. 이제 나이도 들고 분명 이 일에도 부침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이에 맞게 어른스런 음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곡부터 묵직한 음악으로 시작했다. '사랑은 구라파' 이런 곡. 꼭 트로트 같다. 근데 지나고 보니 나 아니더라도 그런 음악 하는 사람 많더라. 그리고 미리 나이 드는 거 걱정할 필요 없더라. 연애도 그렇듯이 오늘 좋으면 내일 만나고, 일주일 좋으면 다음 주 또 만나고, 한 달 지나면 그 다음 달도 만나고. 미리 '우리 삼 년은 사귀어야 되지 않겠냐' 이렇게 시작하면 인생이 부담스러운 거다. 마침, 저번 일본공연 갔을 때 보니 한 50줄 되는 뮤지션이 인디밴드 제작하고 나이에 맞게 활동하고 있더라. 어쩌면 우리 나이 때부터 후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이화정 기자 혈기왕성하다. 걱정이 있더라도 안 할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런 긍정이 대체 어디서 오나?

이한철 원래 집안 분위기가 그랬다. 이쪽 팔 부러지면 반대쪽 팔 안 부러져서 다행이다고 한다. 어릴 때 이야기인데, '다행이다 찾기 놀이'같은 걸 했다 어머니랑. 고등학교 때 한쪽 눈이 다쳐 심하게 수술한 적이 있다. 걱정하고 겁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쪽 눈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지 않냐고 했다. 그게 다행이다 찾기 놀이다. 어머니가 나중에 어릴 때 기타치고 공부 안 하고 그래도 엇나가지 않고 나쁜 데로 빠지지 않고 집에서 앉아 기타만 치고 정서적인 걸로 사춘기를 보내서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하시더라.(웃음)

이화정 기자 지금도 다행이라 생각하나?

이한철 다행일 뿐 아니라 잘 되고 있는 거 같다. 음악하면서 좋은 상황 나쁜 상황이 있었지만 결국 길게 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든 판을 내고 노래할 수 있었다. 그 중간에 팬들 많고 음반 많이 팔던 가수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가수 안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도 나는 어쨌든 인생을 걸고 하고 있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뿐 아니라 천만다행인 거다.

프로필 I 1993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동상, 1994년 MBC대학가요제 대상, 1995년 솔로데뷔, 1998~ 지퍼 리더, 2000~ 불독맨션 리더, 현 인디레이블 튜브앰프 운영 I 음반 솔로 <DEBUT>(1995) 솔로 1집 <되는 건 되는 거야>(1997) 불독맨션 <Debut E.P>(2000) 불독맨션 1집 <FUNK>(2002) 불독맨션 2집 <Salon De Musica>(2004) <Organic>(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