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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ㄱㄴㄷㄹ

가을

거울노을 2007. 5. 29. 11:46
그는 창문을 활짝 열고 중얼거렸다.

"가을인가..."


그가 여름내내 바랬던 일은 가을이 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그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인 그는 여름만 되면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땀을 한바가지 흘리곤 했고, 비마저 싫어하기 때문에 장마로 가득한 여름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작년 여름에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되어지던 여자와 헤어진 후로는, 여름이라는 단어에 일말의 정을 줄 수 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창문을 활짝 열고 '가을이다!' 라고 외쳐보았지만 되돌아 오는 것은 후덥지근한 열기이거나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방울뿐이었다. 결국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한 그는 정신없이 지내기로 결심했다. 미뤄두었던 모든 일들을 꺼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한 것이다. 다행히도 남은 여름을 다 써도 모자랄만큼 일은 많이 쌓여있었고, 어제에서야 그는 겨우 틈을 내어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새벽 늦게까지 술잔을 걸치고 늦잠을 잤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회사로 전화를 걸어 월차를 낸다고 말하고 난 후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뭘할까 생각하며 딩굴거리다가 무심코 창문을 통해 하늘을 바라본 그는, 이제야 비로
소 가을이 온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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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로 세면실에 들어가 면도를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성을 다해 씻었다. 가을에 어울리는 갈색체크무늬 셔츠를 꺼내 입고 창문 앞에 서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그는 창문을 열었다. 천천히. 활짝. 그리고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여 창문턱까지 다가와 있던 가을의 향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이윽고, 온몸이 가을의 기운으로 충만해졌다고 느껴질 즈음,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보며 말했다.

"가을인가."

잠시 후, 그는 거리에 나와 있었다.

딱히 가을이 되면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하나도 없었다. 단지 가을이기에, 가을의 거리를 거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집 앞의 대형할인점은 여전히 세일중이었고, 언제 시작했는지 이제 기억도 잘 안 나는 네거리의 공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간헐적으로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그다지 바뀐게 없어 보이는 행인들의 옷차림. 그는 때때로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르름이 그에게 가을이 왔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래서 그는 거닐기를 포기하고, 어느 공원의 잔디밭에 털썩 누워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은채, 언제까지나 가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